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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덕혜옹주 - 애도문 쓰기

장혜철 2014.10.24 01:05


덕혜옹주
국내도서
저자 : 권비영
출판 : 다산책방 200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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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안민학의 애도문

1576년(선조 9) 안민학이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

[구성 및 형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부인 곽씨의 관 속에 넣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였던 것인데, 1978년 후손들이 선대의 산소를 이장할 때 발견되어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400여년동안 무덤 속에 묻혀 있던 이 애도문은 미라화 된 시신 위에 놓인 채 한지의 색만 약간 변색되었을 뿐, 육필의 묵색은 매우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체재는 가로 83cm, 세로 53cm로 두 장의 한지를 이어 붙여 쓴 것인데, 매행 23자 내외로 29행이 쓰여 있다.


[내용]

 이 애도문에서 안민학은 곽씨 부인이 편모슬하에서 자라다가 14세에 자기와 혼인하여 23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함께 새오할하였던 일들을 회상하며 그 내용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부는 빈한한 가정에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고, 회한에 쌓인 일도 많았는지 서두부터 그러한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편모 봉양과 병든 남편 받들기에 힘겨웠떤 데다가 무리를 하여 유산한 끝에 중병을 얻게 되어 끝내 죽게 되었으니, 남편이 되어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참회한다 하였다. 이어서 어려웠던 생활 중에서도 금실 좋게 지냈던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자신도 따라 죽어서 넋이라도 함께 다니고 싶다는 애절한 심중을 토로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애도문은 조선 선조대 부부간의 의식구조와 생활습속의 일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따. 조선조 선비들이 남긴, 한글로 된 문장은 시가문이나 내실의 여인들에게 보낸 간단한 서간문들 뿐인데, 이 애도문은 당시의 생활 용어로 쉽게 풀어서 쓴 구어체의 산문 문장이고, 장문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국문학계에서 보지 못했던 선조 당시의 문체의 특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특히, 이 애도문은 지은이의 친필유고이기 때문에 작품을 원작의 상태로 평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표기법, 음운의 변천, 고어법 등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애도문]
 늙은이 안민학은 아내 곽씨 영전에 고하니라. 나는 임인생이요 자네는 갑인생으로 정묘년 16일 혼인하니 그때 나는 스물다섯이요 자네는 나이가 열셋이었소. 나도 아비 없는 가난한 홀어미의 자식이요 자네도 가난한 홀어미의 자식으로 서로 만나니 자네는 아이요 나는 어른이나 뜻이 어렸을 때부터 독실하지 못한 선비를 배우고자 하여 부부유별이 사람에서 큰 일이므로 친하게 말 것이라 하여 자네와 나는 가깝게 말인들 하며 밥 먹은 때인들 있으랴. 내 자네에게 밤이나 낮이나 늘 가르치기를 어머님 봉양을 지성으로 하고 남편을 따르는 것이 아내의 도리라 이러던 것이 십년을 함께하여 바라는 것이로되 그대 내 뜻을 안 받고자 할까마는 가난한 집에 홀로 된 시어머니 위에 있고 나 하나 세상 물정에 어둡고 제주가 없어 집안일에는 아주 차리지 못하니 고싯긔(고식적) 봉양하는 정이 다했다고 어찌 할까?

 내 입을 옷도 못 하고, 행여 실잣기를 하여도 나를 해 주리라 하니 그대는 겨울이라도 아무런 저고리 하나나 하고 영오(겨우?) 장옷 하나나 하고 누더기 치마만 하고 바지도 벗고 차가운 구들에서 서어한(서늘한, 설핏한?) 자리하고서 견디니 인내와 고생이야 이 위에 있을까? 그대 점점 자리 키도 커서 내가 늘 희롱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길러 내었으니 나를 더욱 공경하라." 하니 그대가 죽었다 하나 잊을 것인가?

 내 벗도 있으며, 서울 계신 내 모친을 번거롭게 하여 헛 이름을 얻어 두번째 공도로 참봉을 하니, 내가 내 몸을 돌아보니 하도 부끄러워 다니고자 하는 것이 아닌 줄을 그대 사뭇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글로 기뻐하는 뜻이 없고, 내 매양 그대더라 말하기를,

 "어머님이 하도 하고자 하신 것 마지 못하여도, 나중이면 파주나 아무 데나 산수 있는 가 집을 짓고 죽을지언정 봉천을 시름하고 수석 간에 가 살다가 죽자."

 하니 그대 그 말을 좋게 여겨 들으니 내가 늘 그르네.

 물욕 적은 이는 그대 같은 이 없다 하여 늘 살 땅을 못 얻어 하더니 어찌하여 내 몸에 죄가 쌓여 병든 나는 살았고 병 없던 그대는 백년해로할 언약을 저버리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어디로 가셨는가. 이 말을 이르건대, 천지가 끝이 없고 우주가 넓고 넓을 따름이로다. 차라리 죽어 그대와 넋이나 함께 다녀 이 언약을 이루고자 하되 어버이를 공경하여 울지도 마음대로 못 하거든 내 서러운 뜻 이룰까?

 그대 오륙 년 전부터 늘 심열이 있어, 봄이면 자다가 갑자기 냉수 달라 하고 혓바늘이 돋고 하니, 그대의명이 되게 박하여 모자간의 변도 만나고 나도 사나워 그로써 그대 마음 쓰게 한 것이 많고, 그것도 많이 성질을 몰라 조그마한 일이라도 두어라 아니하니, 그리하여 병이 많이 들고 겨울이면 의복도 그리 설피니, 술남이를 구월에 낳은 후부터는 조리도 잘 못하니 더욱 병이 들어 나중에 을해년 유월부터는 아래 자식이 다시 기운이 편치 않아 누웠다 일어났다 하고 음식도 덜 먹고 하니 내나 그대 어머님이 다 태기라 하여 또 아들이나 할까 하여 기뻐 말하고 하더니, 그러므로 나는 믿어서 약을 진실히 못하고 그해 팔월 추석, 제를 홍주의 부분에 제하여 가서 인하여 유산을 하고, 그월 스무날 후에야 모든 그대 병이 중하였으니, 그때부터 정말 병인 줄 알고 의약을 시작하였으되, 그대가 약을 아니 먹으니 가까스로 인삼, 형개산을 설(가루) 하나만 보고 먹다 벌써 병이 겨웠고, 그대 명이 그만한 것도 인력으로 어찌할까 하거니와 그리 병들게 하는 고로 내가 남편이 되어서 무무상효 다시 이 한 넋이 대답할까?

 자식이 둘 있으니 딸이 가계를 할 것이니와 술남이가 제 목숨이 길어 살아나면 이는 그대가 비록 죽어도 그대 이어 가고, 우리 다 죽은 후라도 자손이 있어 자기라고 할 것이로라 하겠기로 위로하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사나이 일생을 서러워하며 그저 살까. 내 뜻은 자식이 있으니 그대 삼 년을 지내고 양첩이나 하여 그대 자식을 후에는 어려운 일 없게 하고자 하네만 노친이 계시니 일을 끝내 마음대로 못할 것일지언정 내 뜻대로 삼년을 다 기다리며 장가들지언정 아니 들리라 할까 하거니와 그대 위하여 한 해 상복을 입네. 첩이나 장가나 하다가 쉽게 상복을 벗은 후에야 할까. 술남이 살아나면 그대 조상 봉사를 온전히 맡기로 그대의 기물을 모두 두 자식에게 나누어 주고 나는 쓰지 말고자 하네.

 그대 죽을 적에, 그대 파주의 그대 아버님 분묘 근처에다가 묻으라 하니, 이는 나 죽은 후에 부지 홍주의 선영에 잘 것이니, 이제 그대를 아버님 곁에다가 묻을 것이로되, 내 죽기 전에는 고혼이 될 것이요 파주도 아주 버릴 것이니 그대가 임종에 이르던 말을 좇아 파주로 하려 하거니, 내 거기 들기 어려우니 나 곧 홍주로 가 들며 술남이의 어버이를 제각기 묻으며 우리들 죽어서나 한 곳에 갈까? 이 일은 이제 그 피치 못할 새 내가 병든 것이 이리 망극한 상흔 보고 얼마나 오래서 죽을까. 죽기 전에는 꿈에나 자주 보고 서러워할 것이니, 나는 그대 어머님 향하여 그대 주지하고 조금은 내덜가 이식들이 기르시면 자네 사뢸 일을 아니할까? 그대 어머님과 자식들은 내 살았으니 어련히 할까? 잊고 가 계심이 망망코 서럽고 그리운 정이야 평생을 잇는다고 끝이 있을까?

 이제 처치하는 일만 하네. 죽는다고 정령이 있으면 모를까 하도 망극하여 붓 잡아 쓰노라 하니 정신이 없어 자주 그러하시매 거꾸러지며 말도 차서 없으니 자세히 보소.

 나는 승지 아주버님과 장령 아주버님네 위로하여 주시네. 벗들도 진정하여 돌아보네.

 말이 이에 이르자 길게 통곡하고 그치네. 병자년 오월 10일. 입관할 때 넣음.


<법정스님 입적 애도문>
 오늘 우리 종단의 큰 스님이자, 무소유의 정신과 실천으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계씬 법정스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버리고 영원한 해탈의 길에 드셨습니다. 우리 종단은 스님의 열반 앞에 애통한 마음을 감출 길 없으며 전 종도와 더불어 깊은 애도를 드립니다.

 스님께서는 그동안 [무소유]의 지혜를 일러 주시고, 청빈의 도와 밝고 향기로운 삶을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자의 본분을 지켜 온 큰 스승이셨습니다. 또한 스님은 일생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기시어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하셨습니다.

 종도 여러분께서는 애통한 마음에 더해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의 정신을 받들어 수행 정진에 가일층 진력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국민 여러분께서도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차분하게 애도의 마음을 함께 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애도문 쓰기


1989년 4월 21일, 조선의 마지막 황녀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 민족의 본보기셨던 덕혜옹주께서 오늘 76세의 나이로 영면하셨습니다. 우리는 님의 영면 앞에 애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으며, 깊은 애도를 드립니다.

 덕혜 옹주는 그동안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일제 강점기 때에도 일제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과 꿋꿋함으로 전국민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고향을 잊어버리시지 않아 전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조선의 마지막 황녀이신 덕혜옹주의 영면을 함께 애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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